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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ENTJ 취미/ENTJ와 사색 2023. 1. 17. 22:30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데 내 인생에는 왜 이렇게 고난이 많지?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성경은 의로운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바람으로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성경은 크리스천들이 늘 좋은 길만 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으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진 다윗도 사울에게 쫓기며 고통과 두려움 속에 시를 지었으며,
바울은 선교 여정 속의 박해를 제외하더라도 이겨내지 못한 육신의 연약함이 있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은 인생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요즘 생각하는 것은 인생에서 고통은 거의 늘 존재하며,
중요한 것은 그러한 문제에 침잠하지 않으며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완주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지금 온전하지 않은 세계에 살고 있다.
아담과 이브의 원죄 이후 에덴에서 쫓겨난 인류는 불완전하며, 홉스식에 가까운 사회에 살고 있다.
사탄은 늘 우리의 영혼을 삼키려고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문제 상황에 놓이게 된다. 크든 작든.
오늘은 나의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오랜만에 나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내가 힘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의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으로 인해 인간이 고통을 직면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는데,
그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시고 함께 울고 계시며 우리를 안아주신다.
그리고 나는 실제적으로도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방법을 찾지 못할 때,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보내주셨다.
함께 기도하고 나아갈 때, 나의 마음에 다시 큰 빛이 비추어 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나의 감정과 생각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내 영혼에 임재해 주실 때, 나의 생각이 변화되는 것을 느낀다.
나는 과학적인 방법들을 알고 시도해보았다.
그런 방법들도 효과가 있지만, 하나님과 교류할 때, 나의 영혼이 근원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distorted cognition이지만) 나에게 희망의 빛이 크게 비추어지는 느낌이 든다.
어찌보면, 나에게 고통이 임하는 이유는, 내가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손을 잡고 살아 나감을 통해서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에게 많은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는 내가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품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일 수도 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지식과 사고력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내가 느낀 것은,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혹은 더 심한 고통이 삶에 임할 지라도,
일견 절망하고 슬퍼할 수 밖에 없어 보이는 상황을 버텨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문제가 바뀌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할 지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나가는 것.
좋지 않은 상황일 지라도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하나님께 진정한 찬양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 갈 힘을 주신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영광받으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나는 인간으로서 연약하여 고난을 받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한다면 나는 그 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저 우리가 원하시는대로 움직이길 요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우리는 그리 하지 않으실 지라도 나의 주인되신 전능하신 분의 선하심을 믿고 하루하루 한 걸음을 내딛자.
앞 길이 막막해 보일 지라도 고난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때,
그 길이 뒤에 걸어가는 사람들의 길을 평탄하게 해 줄 수 있다.
이 육체적인 고난을 겪음으로 인해서, 나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하지 않을 때의 무력감, 수치감, 두려움, 막막함,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감.
나 또한 이러한 감정을 매일마다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주님으로 인해서 좋은 감정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 고통의 순간들이 언젠가는 지나고, 그러한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게 되는 때가 온다.
그러한 나의 인생에 말미에, 내가 하나님과 함께 걸어간 그 길을 적어 책을 내고 싶다.
내가 수치당할 때, 고통 속에서 신음할 때, 죽음을 목도하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계셨고,
이후에도 영원까지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나의 삶의 기록을 계속해서 남기자.
나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영광받아야 하실 분이시며,
내가 좋지 않은 상태에 일 지라도 상관 없이 그 분은 완전하시며 선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내가 주를 찬양할 수 없을 때에도 함께 하시며 그를 바라보게 하신다.
그리고 다시 내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신다.
직면한 문제의 거대함 속에 위축되어 왜곡된 사고를 하려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며,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긴 안목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볼 수 있게 해 주신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님과 함께 내가 극복 해 냈던 순간들을 기억하게 해 주신다.
나는 작은 존재이며 연약하고 때로는 악한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작은 나의 기도도 기억해주셨고,
지금까지 선하게 인도하여 주셨다.
나의 어린 시절 절망 속에서 한 기도들을 주님은 들으셨고, 그를 이루셨으며,
그의 결과로 지금의 내가 있다.
나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지 주님을 신뢰한다.
나는 그렇게 할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 그러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이 번 고난 또한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증거할 것이다.
내가 믿는 그 분으로 인해 나는 또 한 번 하나의 골짜기를 지나왔더라고.
나는 내가 이룬 업적이 아니라, 내가 만든 스토리로 나의 삶의 가치를 만들고 싶다.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스토리는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는 작은 소녀가 주인공이 된다면 좋겠다.
이 세상에서 내가 보잘 것이 없고 나를 저 버리는 때가 온다고 할 지라도,
주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고 사랑해주신다.
The fear of rejection is a liar.
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죄 사함을 얻었고,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졌다.
The fear of guilt is a liar.
창녀에게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죄 없는 자는 와서 치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있기에
The fear of blame is a liar.
The fear of shame is a liar.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가다보면, 인간의 근원적인 한계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뛰어 넘는 때가 온다고 믿는다.
지금은 겨자씨만한 믿음조차도 가지지 못한 연약한 한 사람일 뿐이지만,
매일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기도를 해야 겠다.
그리고 또한 나의 주변 사람들과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겠다.
하나님이 기도하라는 마음을 주실 때 나는 순종하자.
하나님이 주시는 시야로 세상의 일들을 식별하고 나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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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많은 분들이 글을 읽어주시고 계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따뜻한 댓글과 격려 및 공감은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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